1차 석유파동
제1차 석유파동은1973년 10월 6일부터 시작된 중동전쟁이 10월 17일부터 석유전쟁으로 비화하여 세계의 경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심각한 불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1971년부터 OPEC는 석유이권수입의 인상을 추진해 오던 중, 1973년 10월 16일 페르시아만의 6개 석유수출국들은 OPEC회의에서 원유고시가격을 17% 인상하여 종전의 원유 1배럴당 3달러 2센트에서 3달러 65센트로 인상한다고 발표한 데 이어서, 17일 이스라엘이 아랍 점령지역에서부터 철수하고 팔레스타인의 권리가 회복될 때까지 매월 원유생산을 전월에 비해 5%씩 감산하기로 결정하였다고 발표함으로서, 중동전쟁에서 석유를 정치적인 무기로 사용할 것을 선언하였다.
이 결정으로 인하여 서방세계에서는 '에너지 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하였는데, OPEC의 페르시아만 산유국들은 다시 1974년 1월 1일을 기해 배럴당 5.119달러에서 11.651달러로 인상하였다. 석유에 기간산업의 대부분을 의존하고 있는 서방세계의 경제는 석유부족으로 인한 제품생산의 부족과 제품가격의 상승으로 세계적인 불황과 인플레이션을 만연시켰다. 이 결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선진국 및 후진국을 막론하고 경제성장의 둔화를 가져왔다. 외교면에서는 서방세계로 하여금 이제까지의 친이스라엘에서 친아랍 중동정책으로 기울게 하였으며, 한편 OPEC는 국제석유자본이 독점하고 있던 원유가격의 결정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며, 자원민족주의를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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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석유파동
제l차 석유파동의 결과 OPEC는 '석유메이저'가 독점하고 있던 원유가격의 결정권을 장악하였으나, 인플레이션과 달러 가치의 하락을 고려한 실질원유가격으로 끌어 올리지는 못하였다. 그리하여 1978년 12월 OPEC 회의는 1976년 배럴당 12.70달러에서 단계적으로 14.5%의 인상을 결정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12월 말 이란은 국내의 정치 및 경제적인 혼란을 이유로 인하여 석유생산을 대폭 감축시키고 수출을 중단하였다. 이 결과 73년 제1차 석유파동 이후 배럴당 10달러선을 조금 넘어섰던 원유가격은 불과 6년 사이 20달러선을 돌파하였고, 현물시장에서는 배럴당 40달러에 이르게 되었다. 이것이 제2차 석유파동이다.
제2차 석유파동의 여파는 제1차 석유파동과 마찬가지로 세계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즉, 선진국의 경제성장률은 1978년의 4.0%에서 1979년에는 2.9%로 낮아졌다. 물가면에서는 선진국의 소비자물가상승률은 10.3%를 기록하였으며, 개발도상국의 경우 32.0%의 급격한 상승세를 보였다. 또 석유수입국의 경상수지는 원유수입의 부담 증가로 크게 악화되었는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제국의 경상수지는 1978년의 116억 달러 흑자에서 1979년 322억 달러의 적자로 반전되었고, 비산유개발도상국은 적자의 폭이 444억 달러에서 505억 달러로 확대되었다. 반면 OPEC 산유국의 경상수지 흑자는 1978년의 240억 달러에서 79년에는 770억 달러로 급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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